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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일자 : 2019.7.6
- 같이한 이 : 명수회 부부동반 18명
- 주요관광내용 : 연길박물관, 두만강 뗏목체험, 윤동주 시인 본가 방문
- 여행후기
아침 여섯시에 집을 나섰다. 승용차로 인천공항 까지 50분쯤 걸렸다. 네비양의 친절한 안내 덕분에 인천공항 까지는 무사히 갔다. 차가 막히는 구간은 없었지만 구간구간에 있는 과속을 체크하는 장치가 많아서 속도는 낼 수 없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장기주차장을 찾는데 안내가 부실한지 내가 부실한지는 몰라도 자꾸 엉뚱한 곳으로 가는 바람에 주차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P2주차장 59구역에 주차를 하고 순환버스를 타고 공항1청사에 도착했다. 만남 장소가 바뀌는 바람에 공항내에서도 한 참을 헤매다가 일행들을 만났다. 출입국 지역을 지나서 면세점 거리에서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제2청사가 빠져 나간 탓인지 면세상가는 한산한 느낌이 들었다.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기온은 높지않았지만 습도가 높아서 좀 더운 느낌이 들었다. 점심식사전에 오늘의 첫번째 일정으로 연변박물관을 관광했다. 연길시 인구는 약 60만명쯤 된다고 한다. 그 위 행정단위인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 600만명의 약40%가 조선족이라고 했다. 조만간 인구비율이 줄어서 조선족자치주가 없어지지않을까 현지 동포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길거리 간판은 한글과 간자체 한자가 동시에 쓰여져 있었다. 아마도 한족 비율이 높아서 한글과 한자를 같이 쓰는 모양이었다.
연변박물관은 석조건물이었는데 중국의 관공서 건물답게 거창하게 지어져 있었다. 우리는 3층으로 올라가서 박물관 투어를 했다. 처음부터 보이는 전시대에는 독립운동을 한던 시대의 모습이 정리되어 있었다. 사진과 모형 등으로 사실감 있게 표현을 했는데 아무래도 바탕은 공산주의 색체를 덧 입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길은 간도 땅이다. 조국에서의 삶이 어렵고 지난해서 나라 밖으로 나가서 개척한 땅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살고 있는 후손들의 정체성을 높이고자 하는 뜻의 기록과 전시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일부 전시대에는 명대 또는 고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많지는 않았다. 과연 그 시대의 역사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감이 들었다. 3층을 구경하고 2층으로 내려가서 조선족의 삶과 애환을 담은 전시물을 구경했다. 그 모양은 우리가 어릴 때 많이 보았던 시골풍경이 그대로 재현된 듯 했다. 그 전시물을 살펴보면서 같은 민족이 이 땅을 일구고 살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40분여에 걸친 연변박물관 관광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두만강식당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길거리는 깨끗했고 건물들도 질서정연하게 지어져 있었다. 두만강식당 출입문 유리창에는 구육화과라고 적혀 있었다. 개고기 요리를 주로 하는 곳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냉면을 먹었다. 냉면이 달아서 좀 그랬지만 가이드가 자꾸 맛있는 냉면이라고 해서 그러려니 했다. 곁들인 탕수육을 안주로 맥주도 한 잔씩 했다. 먹고 나오면서 다들 한 얘기들이 있었다. 냉면에 들어 있는 고기는 개고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다들 가졌었다고 했다. 모르고 먹으면 약이 된다니까.
점심 식사후 도문으로 이동했다. 도문에서 뗏목을 탔는데 전날 비가와서 두만강물이 많이 불어 있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뗏목을 타고 하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코스였다. 뗏목은 철판을 둥글게 말아서 만들었는데 안이 비었기 때문에 부력은 매우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르는 강물 위 뗏목에 몸을 맡기고 오른 쪽으로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흘러 내려 갔다. 우리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을 통해서 두만강에 배를 띄우는 우리 민족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도 땅인 도문도 어떻게 보면 우리 땅인데 지긍은 엄연히 비자를 발급 받아서 방문할 수 밖에 없는 외국이 되었다. 이념이 무엇이고 힘이 무엇인가? 다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분별인데... 뗏목체험을 하고 나니 가이드가 1인당 15불을 내고 중국과 북한을 넘나드는 다리 구경을 하자고 했지만, 우리는 노. 다시 버스를 타고 연길을 지나서 용정 양동마을에 있는 윤동주 생가를 찾았다.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잘 관리가 되고 있었다. 건물은 세군데로 나누어져 있었다. 입구에 교회 건물이 있었고 교회를 지나면 생가가 나오는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생가와 마주하는 곳에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 안에는 이런저런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많지 않았다. 넓은 마당에는 곳곳에 돌로 만든 시비들이 늘어서 있었다. 서시도 있었고. 생가 구경을 하고 나오니 많은 어르신들이 꽃길을 가꾸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공일자리 창출인가? 담장 안에는 집들이 없어진 곳이 많았다. 주인 없는 집 울타리엔 앵두가 발갛게 익어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해란강과 일송정을 차창으로 보면서 오늘의 기착점인 이도백하로 이동했다. 이도백하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길 옆으로 강이 흐르고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숲에는 뭔가를 채취하는 사람들이 언듯언듯 보였다. 산야의 나무는 대체로 자작나무였다. 찻길 옆은 끝없는 구릉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도백하는 백두산 자락이다. 옛날 여진족이 청을 만들어서 내려가면서 자기들이 나고 자란 땅에 아무도 못들어가게 한 역사가 아직도 남아 있는지 인가와 논밭은 없고 끝 없는 수림만 계속되었다. 여진은 고구려의 기저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와 먼 족속은 아니다 싶었다. 여덟시(한국시간 아홉시)에 식당에 도착했다. 가게 이름은 강원도 식당. 주인장 할머니가 강원도 출신이라고 했다. 저녁상은 푸짐했다. 돼지수육, 삶은 닭, 산천어 회, 시래기국, 매운탕, 석이버섯 등등 상이 가득했다. 빼갈 '형제' 두병을 가이드가 내서 반주로 하니 밥 맛이 더 했다. 오늘 우리가 묵을 숙소는 다이너스티호텔이다. 시설은 깨끗했고 방도 넓었다. 저녁을 먹고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서 씻고 일기를 적으려고 노트를 꺼내 놓고 한 참을 생각에 빠졌다. 한글 간판이 가득한 거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여기가 한국인가 중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 밖을 내다보니 호텔 이름이 '왕조성지온천주점'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 곳은 청나라(후금) 지도부인 여진족의 성지인 것이다. 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도 성지라고 하고 중국에서도 성지라고 한다. 서로 자기 성지라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맞은 말이다.
1.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시간이 많이 남아서 커피도 한 잔 하고 면세점 거리를 돌아 다녔다. 꼭두 새벽에 나설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일행들
타고 갈 비행기에 화물을 적재하고 있었다.
2. 연길에서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하루에 뜨고 내리는 비행기는 많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군사 비행장과 겸용하고 있는 듯 했다.
연변박물관 입구
박물관 1층 로비
3층에서 내려다 본 모습
3층 박물관 입구
무시무시한 작두. 옛날 사형 도구의 하나
노랗게 색칟된 곳이 항일 전투가 많았던 간도지역 길림성이다
조선족의 삶
연변 축구장. 지금은 지역축구팀이 예산문제로 해체되었다고 아쉬워들 했다.
깔끔하고 말끔한 시가지 모습
4일간 타고 다닌 버스
두만강식당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다.
3. 도문에서
뗏목 승선장. 건너편이 북한 땅이다.
바람이 몹씨도 불고 추웠다.
초정
흥 많은 친구
하류쪽. 왼쪽은 중국, 오른 쪽은 북한. 비가 많이 와서 물살이 사나웠다.
주차장 옆에서 춤을 추고 있는 현지인 들. 춤 잘 추더라.
우리가 타고 다닌 버스
이도백하로 가면서 차창가로 본 풍경들
용정시를 가로 질러 내려가는 해란강 풍경. 그 때 그 사람들이 저 강을 바라보면서 타관의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다.
한글과 간자로 쓰여진 간판 들. 화룡 가기전 회풍
4.용정 양동마을에서
윤동주 생가 박물관
양동마을
교회
전시관
생가
꽃길을 가꾸는 사람들
5. 이도백하에서
저녁을 먹은 집, 주인장 할머니가 강원도 출신이라고 했다.
빼갈도 마시고~
다이너스티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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